다음날 아침, 하린은 JK그룹 본사 앞에 일찍 도착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로비는 한산했다.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일찍 왔나...'
긴장된 마음에 일부러 서둘러 나온 것이었다. 어제의 합격 통보와 함께 온 강도윤의 메시지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서하린 씨, 하은 양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다. 수술을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얼마나 급한가요...?"
"늦어도 한 달 안에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더 미루면 위험할 수 있어요."
하린의 손이 떨렸다. 한 달.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모은 수술비는 겨우 3천만원. 필요한 금액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진정해...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메이크업을 고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어머, 서하린 씨?"
정장 차림의 우아한 여성이 들어왔다. 어제 면접장에 있었던 인사팀 과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이렇게 일찍 오셨네요. 회장실 가시는 거죠?"
"네..."
"긴장하지 마세요. 부회장님이 직접 불렀다는 건 좋은 의미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하린은 애써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더욱 불안해졌다. 강도윤이 그녀를 부른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9시 55분, 하린은 회장실 앞에 도착했다. 비서가 그녀를 맞이했다.
"서하린 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부회장님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호화로운 응접실에 앉아있자니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면접장에서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의 충격이, 10년 전의 기억이...
[도윤 선배, 이거 제가 만든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너... 요리도 할 줄 아는구나.]
[당연하죠! 제가 이것저것 잘하거든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은 그에게 도시락을 건넸던 날.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본 순간이었다.
"서하린 씨."
차가운 목소리에 하린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강도윤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앉으세요."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완벽한 수트 차림, 단정하게 넘긴 머리, 날카로운 눈매... 10년 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어제 면접에서 합격하셨다는 걸 들으셨을 텐데요."
"네..."
"하지만 그건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하린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네...? 무슨 의미이신지..."
"대신, 다른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밀어냈다. 하린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계약 결혼 동의서'
"이게 무슨..."
"간단합니다. 1년간의 계약 결혼을 제안합니다. 조건은 서류에 모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를 훑어보았다. 계약 기간, 위자료, 그리고... 즉시 지급되는 거액의 계약금.
"왜... 하필 저에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게 필요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뿐이죠."
도윤의 말투는 비즈니스적이었다. 마치 거래를 제안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답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4시간 드리겠습니다."
하린은 말없이 서류를 바라보았다. 계약금으로 제시된 금액은... 하은이의 수술비를 훨씬 상회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도윤이 차갑게 덧붙였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요."
하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만 가보세요. 내일 이 시간에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린은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서하린 씨, 죄송한데 하은 양이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린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섰다.
"지금 당장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어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이번 주 내로 수술을 진행해야 해요."
"이번 주요...?"
하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중환자실을 바라보았다. 산소 마스크를 쓴 채 잠들어 있는 하은이가 보였다.
'엄마, 아빠...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떠올렸다. 하은이는 그녀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린은 강도윤이 건넨 서류를 다시 꺼내들었다. 계약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 기간: 1년
계약금: 2억 원 (즉시 지급)
위자료: 1억 원 (계약 종료 시)
조건: 완벽한 부부 연기, 과거 관계 비밀 유지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작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계약 기간 중 서로에 대한 감정 개입 절대 금지'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10년 전에 끝났어야 할 감정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정세리였다.
"하린아! 합격했다며? 축하해!"
"고마워..."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 일 있어?"
하린은 잠시 망설였다. 세리는 대학 시절부터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녀만이 알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있었다.
"세리야... 나 강도윤 선배 만났어."
전화 너머로 놀란 숨소리가 들렸다.
"뭐? 설마... JK그룹 그 강도윤?"
"응. 어제 면접관으로..."
"세상에... 그래서 어땠어?"
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더라. 하지만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래."
"하린아..."
"그리고 지금... 나한테 계약 결혼을 제안했어."
"뭐라고?!"
세리의 놀란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미쳤나봐... 그 사람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하은이 수술비가 필요해. 이번 주 안으로..."
"하린아... 설마..."
"응. 아마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창밖으로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10년 전, 그와 헤어지던 날과 같은 빛깔의 하늘이었다.
[미안해요, 선배.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떠나는 거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 하은이의 병원비, 그리고... 그와의 이별.
'이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선배.'
하린은 서류를 움켜쥐었다.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하린은 다시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강도윤은 창가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답은 정하셨나요?"
하린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네. 계약... 받아들이겠습니다."
도윤의 표정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현명한 선택이네요."
그가 책상 서랍에서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계약금은 오늘 중으로 입금될 겁니다."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쓰는 순간,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당신은 JK그룹 강도윤의 아내입니다. 완벽한 연기를 부탁드립니다."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도윤이 차갑게 덧붙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사이로 시작하는 겁니다. 10년 전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 한켠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회장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폰으로 계약금 입금 알림이 왔다.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하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JK그룹 부회장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르는 진실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10년 전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것.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이 될까요, 선배?'
창밖으로 흩날리는 벚꽃 잎이 하린의 시선을 붙잡았다. 마치 10년 전 그와의 첫 만남처럼,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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