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서점
1
해질녘, 골목 한 켠에 자리한 작은 서점의 간판이 천천히 불을 켰다. 오래된 나무문을 밀면 잔향처럼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주인은 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중년의 여자였고, 이름은 미나는 가게의 첫 손님을 맞으며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그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이 늦은 첫 손님이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남자, 손에는 낡은 노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서가 사이를 맴돌다가, 한 구석에 놓인 낡은 소설집을 꺼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놀림이 조심스러운 걸 보니, 오래전의 습관이 남아 있는 듯했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세요?" 미나가 물었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깊은 그늘이 있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는지 몰라요. 다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을 달래줄, 그런 이야기였으면 합니다."
미나는 잠시 생각한 뒤 작은 등 하나를 켰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쓰인 단편들이에요. 다만, 이 가게에선 책이 선택받는다고 믿습니다. 가끔 사람을 골라주기도 하고요."
남자는 웃음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책을 받아 들었다. 페이지 사이에서 떨어진 작은 종이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 조각에는 연필로 촘촘히 적힌 한 문장이 있었다. "잃어버린 것은 때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보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일 뿐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현듯 그의 얼굴에 떠오른 작은 기억 — 여름의 한낮, 작고 시원한 카페 테라스에서 함께 웃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그 기억을 붙잡고 싶었지만, 어쩐지 손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책을 샀다. 서점 문을 나서며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2
밤이 깊어질수록 서점은 더욱 조용해졌다. 미나는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은 오래된 라디오 소리를 낮추고, 서가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남자가 남긴 작은 흔적을 발견했다. 노트였던 걸까. 책갈피로 쓰였을 듯한 낡은 봉투 하나가 서가 틈에 끼어 있었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잉크가 바래 있었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나는 기억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다니죠.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나는 물음표를 남겨요. 찾고자 하는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미나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서점은 이미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지만, 이 편지는 뭔가 다르게 울렸다. 어쩌면 그 남자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을 모으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서점 앞에 또 다른 손님이 왔다. 밝은 표정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미나에게 보였다. 사진 속에는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이 사진의 뒷사람을 찾고 싶어요." 그녀는 단호했다. "제게는 그 사람이 중요한 기억이에요. 그런데 정작 저는 이름도 모른 채 잊히고 있나 봐요."
미나는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난밤의 편지가 떠올랐다. 기억을 모으는 사람, 물음표를 남기는 사람. 그녀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3
미나는 서점 한 켠에 작은 게시판을 만들었다. '기억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붙이고,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거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적어넣을 수 있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작은 봉투들이 게시판 아래로 모여들었다.
어떤 봉투에는 이별의 편지, 어떤 봉투에는 오래된 생일카드, 또 다른 봉투에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 그림이 들어 있었다. 봉투마다 사연이 있었고, 그 사연들은 미나의 가슴을 하나씩 두드렸다. 그녀는 저마다의 기억을 소중히 모았다. 그 안에는 아프고 기쁜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 검은 후드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표정이 달라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 하나를 미나에게 건넸다. "이건… 누군가의 기억을 되돌려주고 싶어서요."
미나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오래된 음악 공연 티켓과, 작게 접힌 종이 쪽지가 있었다. 쪽지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와 듣던 음악을 다시 틀어보면, 넌 어디에 있던가요?"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이건 제게 중요한 사람의 흔적이에요. 그녀는 어쩌면 제게서 도망간 걸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도망간 걸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저는… 찾고 싶었습니다."
미나는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기억은 단순히 찾아서 돌려주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때로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필요로 하도록 돌려주는 것, 혹은 그 기억을 품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 중요해요."
남자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작은 계획을 세웠다. 서점에서 열리는 금요일 밤의 작은 음악회에서, 그 노래를 틀기로 했다. 손님 몇 명이 올 거라고 했고, 그 노래가 울리면 혹시 잊힌 얼굴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4
금요일 밤, 서점은 작은 무대가 되었다. 등불 몇 개, 오래된 기타 한 대, 그리고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들. 남자는 무대 한쪽에 서서 기타를 챙겼고, 미나는 무대 근처에서 서서 조용히 박자를 맞추었다.
첫 음이 울릴 때, 사진 속 희미하게 번진 얼굴이 문득 한 사람의 표정으로 떠올랐다. 그 사람은 공연장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고, 오래전의 웃음을 지금의 얼굴에 꺼내어 놓고 있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고, 남자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는 기억의 끈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공연이 끝난 뒤, 희미하던 얼굴의 주인은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어색함과 안도의 혼합이 있었다. 말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잃어버린 조각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5
그날 이후로, 서점의 게시판에는 더 많은 봉투가 모였다. 사람들은 잊고 싶었던 것, 잃어버린 것,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을 적어 넣었다. 미나는 그 사연들을 하나씩 읽고, 가능한 방법으로 기억을 되돌려주거나, 새로운 의미를 붙여 주었다. 어떤 때는 단순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검은 후드의 남자는 가끔 찾아와 새 노트를 남기고 갔다. 그는 여전히 기억을 모으는 자였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기억을 되돌려줄 때마다 자신도 덜 외로워짐을 느꼈다. 젊은 여자는 사진 속 인물과 다시 연락을 이어가며 작은 기쁨을 되찾았다. 미나는 서점이 단순한 책의 집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이 모이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 늦은 밤, 미나는 서점 창밖의 가로등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편지의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억을 모으는 일은, 결국 사람들을 잇는 일입니다."
미나는 편지를 접어 책 속에 넣었다. 서가 틈새에 숨겨진 작은 흔적처럼, 그 문장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서점은 여전히 조용했고, 하지만 이제는 그 조용함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었다.
문득 미나는 자신도 잊고 싶지 않은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던 따뜻한 손과 함께 들었던 자장가의 마지막 음. 그녀는 작은 노트를 꺼내 그 노래의 가사를 적었다. 그리고는 게시판 옆에 조심스럽게 붙여 놓았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서점의 불빛은 골목길을 가만히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금도 잃어버린 것을 찾아 이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기억이 서가에 안기고,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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